이번에는 경주교촌마을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드릴 거예요. 먹은 사진들은 따로 포스팅하려고 빼 두었습니다. 한 번에 전부 보여드리기에는 너무 길어지더라고요. 제 능력이 뛰어나서 깔끔하게 정리해서 짧게 다 보여드리면 좋은데 능력이 부족해요. (-∧-;)
각설하고 이번 포스트에서는 경주교촌마을 보여드릴게요. ヽ(•̀ω•́ )ゝ
경주교촌마을 길 건너편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요. 월요일 오전이라 주차장은 넉넉했고 주차비는 무료입니다. 물론 입장료도 없어요.
입구에 있는 안내문에 의하면 경주 교촌은 신라 신문왕 2년(682년)에 설립된 한반도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있던 곳이라고 해요. 신라의 국학 -> 고려의 향학 -> 조선의 향교로 이어졌다네요. 마을 이름이 교동, 교촌, 교리 등으로 불린 것은 향교가 있기 때문이고 또한 교촌은 신라의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사랑을 나눈 요석궁이 있던 곳이라고 합니다.
경주는 신라의 수도로 유명하지만 경주교촌마을의 한옥들은 조선 시대의 집이에요. 어찌 보면 당연한 거겠죠?
경주교촌마을의 한옥들은 장사를 하는 곳이 많지만 실제로 거주를 하는 집들이 많다고 하네요. 오래전부터 이곳에 살면서 카페를 하시는 분도 계셨어요.
한옥 사이로 난 골목길을 아이들과 걸으니 너무 좋더라고요.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방문객들도 많지 않아서 사람 한 명 없는 골목길도 쉽게 만날 수 있었어요. 평일 일찍 방문하면 이런 장점이 있네요. (┘ ̄︶ ̄)┘└( ̄︶ ̄└)
여기는 경주 최부자댁이에요. 한 번씩은 들어보시지 않았나요? '경주 최부자'
경주 최 씨 최부자의 종가로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합니다. 최부자의 집안은 도덕적 의무와 관용을 몸소 실천해 온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을 써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한 집안이라네요.
1779년 경에 건립되었고 원래는 99칸이었다고 전해지며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곳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규모가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한옥에 대해 잘 모르는 저로서는 어디가 문간채이고, 사랑채인지 어디가 안채이고 사당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방마다 다른 위치와 크기를 보고 대충 짐작만 할 뿐이죠. (;′⌒`)
1947년 경주 최부자 12대손 문파 최준선생이 기증하여 현재 학교 법인 영남학원 소유라고 합니다.
최준선생은 마지막 최부자로 알려져 있죠. 전 재산을 독립운동과 교육 사업에 투자하고 일제강점기 때 백산상회 대표로 활동. 일제의 치열한 감시 속에서 임정 등 독립운동 단체에 자금을 지원하였고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학원의 설립자라고 하네요.
정말 존경받을 집안이고 후손들이죠. d( ̄◇ ̄)b
저기 서울 어디서 맨날 자기들끼리 싸우고 할 일도 안 하면서 자기들 월급 올리는 일에만 단결하는 그런 놈들은 잘 먹고 잘 사는데 말이죠. (♯▼皿▼)
최부자댁에는 관리사무실도 있어요. 그런데 저곳을 그냥 벌컥 문을 여는 사람들이 있나 봐요. 옆에 '호기심으로 제발 그냥 문을 열지 마세요!'라는 문구를 출력해서 붙여놨네요. 노크의 생활화를 해야겠어요.
이렇게 경주 최부자댁을 둘러봤는데 어렴풋이 알던 경주 최부자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되고 그 후손들이 살아온 삶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될 수 있어서 저는 더 좋은 여행지라고 생각해요.
원래는 경주교촌마을 포스트를 이거 하나로 끝내 보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너무 길어져서 2편으로 나눠야겠네요.